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쿠가와 요시노부 (문단 편집) == 평가 == [[망국의 군주|마지막 쇼군]]으로 유명하지만, 생애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이 사람의 정치적 리즈시절은 전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이에모치]]의 섭정이자 교토 조정의 총독으로서 공무합체파 정권을 이끌던 시점이다. 오히려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은 이에모치의 급사로 공무합체가 붕괴하고 막부가 거의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망조가 든 시점에서 일종의 파산관리인으로 앉혀진 것이었다. [[에도 막부]]의 [[망국의 군주|마지막 쇼군]]이라 이미지는 썩 안 좋지만[* 훗날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총선]]에서 패해 [[55년 체제]]가 깨지고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정권을 뺏기자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라고 불렸다.] 의외로 유능했던 인물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번체제 이후의 구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카리스마도 있었으며, 날카로운 정보 분석에 의한 정치력을 겸비했었다.[[https://web.archive.org/web/20210722060747/https://bizgate.nikkei.co.jp/article/DGXMZO7391639015072021000000?n_cid=TPRN0002|#]] [[기도 다카요시|카츠라 코고로]]는 >"요시노부는 [[덕천가강|이에야스]]의 재림이다(慶喜は、徳川家康の再来なり)" 라고 평가했고, [[사카모토 료마]]도 [[대정봉환]] 이후에 요시노부가 정권을 주도하는것을 구상했을 정도였다.[* 요시노부가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를 알게된 건 아키하루에 들어간 이후였다고 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서야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질 정도로 당대에는 지명도가 낮았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인 1914년 3월 24일, 독일의 지멘스 회사 사건(해군 비리) 때문에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제1차 내각이 소멸당했던 직후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인물들 중 (1903년 12월 4일부터 귀족원 의장을 맡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27일에 정식 총리 후보로 출마했으나 2일 이후에는 일본 정부 내각에서 도쿠가와 정권으로 번지는 걸 우려했기 때문에 (그가) 자진 사퇴했다.(그 직후로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총리 당선으로 자리잡았음)] 또 [[이토 히로부미]]는 >"어젯밤 대담에서 완전히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昨夜の対談で全く感服してしまった。実に偉い人だ。)" 라고 말하기도 했다. 막부의 신하로서 요시노부를 섬겼던 실업가이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 역시 요시노부를 높게 평가하며 평생 그를 모셨다. 그는 증손자이자 시부사와 가문 4대 당주였던 마사히데에게 "요시노부공의 명예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편찬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에서는 "모욕을 당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돌보지 않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끝맺고 있다.[* 시부사와는 마지막까지 요시노부에게 충성심을 보이며 그를 받들어 모셨다. 시부사와는 "공께서는 세상으로부터 도쿠가와의 가문을 분쇄하러 들어갔다든가, 목숨을 아까워한다든가, 여러가지 악평을 받은 것을 일절 돌아보지 않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도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실로 그 인격의 높은 곳으로 저의 경모를 금치 못할 바입니다(公は世間から徳川の家を潰しに入ったとか、命を惜しむとか、様々に悪評を受けられたのを一切顧みず、何の言い訳もされなかったばかりか、今日に至ってもこのことについては何も言われません。これは実にその人格の高いところで、私の敬慕にたえないところです)"라고 글을 적기도 했다.][[https://web.archive.org/web/20210107033726/https://www.tv-tokyo.co.jp/plus/smp/entertainment/entry/2019/020329.html|#]] 게다가 1868년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에도 진격을 서둘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요시노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어떻게 반격할지 모른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요시노부가 에도성으로 돌아온 이후에 고향의 미토에 폐거한 요시노부를 "미토보다 슨푸성이 좋다"라고 하며 요시노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것이 도막파의 일원 중 한 명이었던 [[이와쿠라 토모미]]였다.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는 [[보신전쟁]]에서 요시노부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상대방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패장이었다. 쇼군 취임 당시 만났던 서양의 공사들도 요시노부를 고평가하기도 했다. 에도에서 교토로 거점을 옮긴 1863년 이후의 요시노부의 정치적 수완은 확실히 뛰어났다. [[시마즈 히사미츠]] 등 유력 다이묘의 정치력을 꺾으면서, 1864년에는 중요 인물로서 '금리어수위 총독'에 임명되어 [[고메이 덴노]]의 측근이 되었다. 같은 해의 [[금문의 변]]에서는 당초 신중파였지만, 일전해 군세를 지휘하여 죠슈 번병을 격퇴했다. 다음해인 1865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 등에 대한 칙허를 얻어 약 7년에 걸친 현안을 해결했다. 결단력도 빨라서, 1866년에는 스스로 주도하고 있었던 제2차 조슈 정벌을 중지했다. 그 후 제15대 정이대장군에 취임했고, 막부의 군제 개혁(게이오의 개혁) 등을 가속화했다. 영국과 프랑스 공사 등 구미 공사들과 [[오사카성]]에서 회견해, 외교 성과를 보여주어 개국파 지도자로서의 인상을 주었다. 계속해서 주저했던 효고 개항도 요시노부가 실현시켰다. 이후 국내에서는 막부 타도 계획에 대항해 [[대정봉환]]을 실행시켜서, 삿초 동맹 등 무력을 사용해 막부 토벌을 진행하려고 했던 토막파의 노림수도 무너뜨렸다. [[왕정복고]]의 쿠데타도 사전에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굳이 보고만 있었고, 우발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교토에서 오사카성으로 피신했다. 요시노부는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오사카성의 막부 군사들을 배경으로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으면 정세가 유리하게 호전한다고 읽고 있었다. 항상 상대의 한 수 앞을 읽어, [[임기응변]]으로 뜻밖의 [[묘수]]를 만들어내는 수완은 훌륭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안도 유이치로(安藤優一郎)는 요시노부의 결점으로 "자신의 강한 정치 기반을 갖지 못한 것"을 꼽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카네 쵸쥬로(中根長十郎, 1794 ~ 1863),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 1822 ~ 1864), 하라 이치노신 등 그가 아꼈던 심복들이 모두 암살되었다. 요시노부의 히토츠바시 가문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창설했으며 가신단은 막부에서 파견된 출향자들로 구성되었다. 막부 인사의 사정으로 교체되어, 다이로도 막부 직책의 하나로, 수년 정도 맡으면 전임해 갔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히토츠바시 가문에서 점점 발탁되어 프랑스에서 가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다른 번의 색을 띠지 않은 유능한 젊은이였던 시부사와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요시노부는 [[아이즈 번]]과 [[쿠와나 번]]과 제휴했지만, 군사면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안도 유이치로는 "요시노부는 막부 내부에 강한 반발을 사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약 5년이나 에도에 돌아오지 않고, 행선지인 칸사이에서 제멋대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불만이 에도성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고 한다.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유일하게 에도성에 들어가지 않은 쇼군이었다. 교토에서 취임해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에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쇼군이 아니었다. 또한 안도는 "자신의 주장을 표변[* 태도·의견 따위가 싹 바뀐다는 뜻]시키는 장면도 여러 번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별명이 '이신덴'(二心殿)이었다. 참고로 [[사이고 다카모리]]는 요시노부에 대해 "확실히 [[인재]]이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確かに人材ではあるが決断力を欠いていられるようである)"라는 평을 남겼다.] 또한 그의 최대 결점으로 "설명 책임의 결여가 결정적이었다. 진의를 설명하지 않고 사전 공작도 하지 않아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상당히 독단적이었다는 것이다. 과묵했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동시대 누구보다 그는 웅변적이었다. 논리가 명쾌했고, 언어도 명료했으며 유력 다이묘와의 회의나 [[교토고쇼]] 내의 조의 등에서의 논의는 거의 불패였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말솜씨가 뛰어나 당대 제일의 [[논객]]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를 승복시키는 것과 진정으로 납득시키는 것은 미묘하게 달랐다. 오랜 맹우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도 종종 그의 저의를 의심했다고 한다. 마츠다이라 슌가쿠는 요시노부를 "100가지 재주와 꾀가 있으나 단 한 가지의 담력도 없다(百の才能や智略があるが、ただ一つの胆力もない)"라고 평하기도 했다.[[https://web.archive.org/web/2021*/https://www.ryozen-museum.or.jp/events/lecture/lecture-20210320/|#]][[https://web.archive.org/web/2021*/https://bizgate.nikkei.co.jp/article/DGXMZO7391639015072021000000?n_cid=TPRN0002&page=3|#]] 역사학자 이에치카 요시키(家近良樹)는 "에도막부 말기 정치의 중심 교토에서 정치적 경험을 쌓았고 권모술수에도 뛰어났던 그의 능력은 돋보였다. 요시노부는 신하나 주위에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고고한 쇼군이었다. 그러므로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이 에도막부 말기 정치 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정봉환]]이다. 요시노부라는 개성(個性)이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요시노부에 이상하리만치 부족한 것이 있었다. 막신이나 민중에 대한 관심, 배려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막부에서 조정으로 정치를 반납하면 당연히 많은 막신이 실직한다. 하지만 대정봉환을 결단함에 있어, 요시노부가 막신의 기분이나 생활에 고민하고 배려하거나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https://www.news-postseven.com/archives/20210610_1666424.html?DETAIL&from=imagepage_f-h1|#]] [[보신전쟁]] 때 너무 쉽게 전쟁을 포기했다라며 아군(구 막부군)은 물론 적군(신정부군)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도 막부는 다시 싸워 볼 만한 저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작정하고 캐삭빵 벌였다가는 향후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역량을 엄청나게 까먹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고 퇴장한 요시노부의 결단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흘렀다.] 더욱이 장병들에게 싸우라고 엄명해 놓고, 자신은 몰래 [[야반도주]]했다.[[https://president.jp/articles/-/52828?page=4|#]][[https://www.excite.co.jp/news/article/Japaaan_146720/?p=3|#]]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 내려오던 우마지루시[*馬印 전국시대에 대장의 말 앞에 세워두는 일종의 표식이다.]인 금부채는 잃어버렸지만[* 여기서 잃어버린건 오사카에 있던 금부채 얘기로, 금부채는 에도 성에도 하나 더 있었다. 에도 성의 것은 현재에도 남아있으며 쿠노잔 토쇼구(久能山東照宮)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애첩은 소중히 챙겨왔다는 썰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어차피 막부 중심의 개혁이라는 건 [[조선]]의 [[동도서기]]와 [[청나라]]의 [[양무운동]]에서 보듯이 한계가 명백했던데다 서방 여러 국가들이 본격적인 개입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할 경우 후에 일어날 일은 일본의 식민지화였으니[* [[청나라]]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았기에 주권을 존중할 필요도 없었다.] 대국을 고려하여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런 식으로라면 본인이 쇼군이었으므로 아예 그 자리에서 개혁을 수행하면 그만 아니냐, 혹은 요시노부가 진심으로 대정봉환의 의사가 있었다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알아서 다 바치고 기었으면 되므로 보신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복잡한 측면 때문에 극과 극을 달리는데, 아는 건 많지만 유약한 엘리트이거나 심하면 약삭빠르고 치졸한 배신자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될 때도 있고, 극도의 현실주의자이거나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며, 고도의 정치적 감각을 보유한 현자로 묘사될 때도 있다. 강경파가 많았던 막부측 인사들은 후일 막부를 엎고 수만 명의 신하(특히 [[아이즈 번]])를 희생시킨 주제에 홀로 유유자적하게 취미생활을 즐기며 우아한 신사로 인생을 마친 그를 경멸해,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불쾌감을 숨기지 않거나 아예 일체의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설이 유력하다. 신 정부의 불만 분자로 몰릴 위험성이 다분해 취미에 몰두해 세속을 떠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자세를 과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구 막부 측 인사의 요시노부 홀대를 잘 보여주는 창작물 캐릭터가 바로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시노모리 아오시]]다. 나름대로 희생을 줄여보려는 생각에 항복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비겁해 보여 싫다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유유자적 말년을 보낸 그에게 실망하여, 신하였던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静)는 "요시노부공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s://bakumatsu.org/blog/2012/05/yoshinobu.html|#]]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시대를 제대로 읽고 [[현실주의|현실을]] [[므나쎄(유다)|냉정하게 받아들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만일 요시노부가 권력을 탐하여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끝까지 내전을 벌였다면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는 더욱 늦춰졌거나 아예 실패로 끝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개혁 세력과 반대 세력이 끝까지 대립한 청나라와 조선은 험한 꼴을 봤다.] 역사학자 마치다 아키히로(町田明広)는 그의 행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하기도 했다.[[https://news.biglobe.ne.jp/trend/0802/jbp_210802_2745635069.html|#]] >"요시노부는 [[근세]]인(近世人)이면서도 [[현대]]인과 같은 논리성과 사고력을 갖추고, 게다가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뛰어나고, 타인을 압도하는 인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말로 상대에게 전하는 것을 생략해, [[직감]]과 [[신념]]으로 신속히 행동했기 때문에, 그 동향은 이해하기 어렵고, 단지 '[[고집]]'이라고 보였을 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근세인이며, 가장 조정을 준봉(遵奉)하고 [[고메이 덴노]]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다. 근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너무 일찍 태어난 현대인" 이후 객관적인 평가가 증가해 온 [[메이지 시대]]인 [[1880년대]] 무렵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재평가]]론이 높아졌다. 요시노부가 철저하게 공순근신(恭順謹慎)해 에도 무혈개성 등을 단행함으로써 막부군과 정부군의 전면 내전을 피해 비교적 원활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 일본의 독립성이 지켜지고, [[메이지 유신]]에 대한 공적이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역사학자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는 요시노부가 고분고분히 명령을 따라 교토나 에도가 초토화되는 것을 모면했으며, 또 프랑스의 원조를 거절했기 때문에 외국의 개입이 없었다고 해 유신 최대의 공로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토리가야베 슌테이(鳥谷部春汀)는 제2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요시노부의 공적이라는 등 극찬하기도 했다.[[https://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6%85%B6%E5%96%9C#%E6%98%8E%E6%B2%BB%E7%B6%AD%E6%96%B0%E5%BE%8C|#]] 역사학자 이시다 미치후미(磯田道史)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후지산]] 같은 사람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바위]] 덩어리이지만, 멀리서 보면 위대한 영봉(霊峰)인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https://web.archive.org/web/20210422225354/https://rekishiru.site/archives/14156|#]]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시노부 교과서.png|width=100%]]}}} || || {{{-1 {{{#fff ▲ '''다이쇼 시대의 교과서 → 2019년의 교과서 '''}}}}}} ||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평가는 시대가 변하면서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일본의 [[교과서]]에서 볼 수 있다. [[다이쇼 시대]]의 교과서에서는 그에 대해 '도망쳤다' '죄를 사죄했다'라고 삿초동맹군과의 싸움에 패해 도망친 끝에, 성을 내준 [[겁쟁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2019년 기준 역사 교과서를 보면 '프랑스군의 군사원조를 거절해 외국의 개입을 막고 일본의 독립을 지키는 것으로 이어진 [[명군]]'이라고 쓰여져 있다.[[https://www.tv-tokyo.co.jp/plus/entertainment/entry/2019/020329.html|#]] [[타임슬립 닥터 진]]이나 [[바람의 빛]] 같은 막부 말기를 다룬 만화에서도 취급이 좋다. 특히 바람의 빛에서의 요시노부는 그야말로 상당히 유쾌한 청년. 하지만 요시노부가 모티브로 추정되는 [[은혼]]의 [[히토츠바시 노부노부]]는 취급이 영 좋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지 유신|막부를 없애고 신정부를 수립하면서]] 요시노부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 '''유신 삼걸'''([[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은 비참하게 요절했으나[* 사이고는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고 할복 자살, 오쿠보는 사족들에 의해 암살, 기도 다카요시는 지병으로 인해 세이난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사망.], 정작 요시노부 본인은 [[다이쇼 시대]]까지 살면서 그 천수를 누렸다. 그의 처세가 쇼군 입장이 아닌 개인으로선 현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